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7-09 18:10

  • 기획취재 > 기획취재

반진(般震)의 정신으로 나라를 세우다… 대아고 설립자 아인 박종한 선생의 교육 철학과 삶

항일 독립운동가에서 교육자, 차문화 운동가까지… 평생을 '사람을 키우는 일'에 바친 아인 박종한 선생의 발자취와 제자들이 영원히 기억하는 교육자의 참모습

기사입력 2026-07-09 18:10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반진(般震)의 정신으로 나라를 세우다… 대아고 설립자 아인 박종한 선생의 삶


"나라를 살리는 길은 교육뿐이다."

이 한마디는 대아고등학교 설립자 아인(亞人) 박종한 선생의 일생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교육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세우겠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헌신한 교육자였다. 또한 우리 전통 차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한 차문화 운동가이기도 했다.

아인 박종한 선생이 남긴 삶은 단순히 한 학교를 세운 설립자의 이야기를 넘어 대한민국 현대 교육사와 지역 교육의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간 한 시대의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진(般震)의 정신으로 나라를 세우다… 대아고 설립자 아인 박종한 선생의 삶


항일운동으로 시작된 청년의 삶


아인 박종한 선생은 1925년 4월 8일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박씨 규정공파이며, 조부는 대제학 박충원의 14세손인 하천(荷泉) 박병집 선생이다. 부친은 만암(晩巖) 박채규 선생으로, 훗날 대아중·고 설립의 밑거름이 되는 교육 재단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삼천포초등학교에 다니다 진주로 이주한 뒤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최남선의 『조선역사』를 접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 '반진단(般震團)'을 결성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44년에는 진주길야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재직하면서 부산항 주요 시설 폭파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됐다.

결국 반진단 단원들과 함께 부산형무소에 투옥됐고, 광복이 되어서야 감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선택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에서 교육자로… 대아고 설립자 아인 박종한 선생의 위대한 삶


교육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결심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학업은 중단됐다.

이어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학문의 길 대신 또 다른 사명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이 되고 곧 분단이 되었습니다. 결국 인재의 빈곤이 눈에 보였습니다. 일본처럼 교육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세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반진단 동지 다섯 명과 함께 "학교를 세우자"는 약속을 했고, 부친이 남긴 임야 50만 평을 기본 재산으로 내놓았다.

1954년 2월 23일, 조부의 호를 따 재단법인 하천학원을 설립하면서 그의 교육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5년 2월에 대아중학교가 개교한다.
 
나라를 잃은 청년이 학교를 세웠다|아인 박종한 선생과 대아고등학교의 탄생


대아고등학교를 세우다


1966년 3월.

아인 박종한 선생은 대아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꿈꾼 학교는 단순히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학교가 아니었다.

올바른 인성과 국가관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984년 대아고등학교는 서울대학교 합격생 66명을 배출하며 전국 최다 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방 사립학교가 대한민국 교육의 중심에 우뚝 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박종한 선생은 숫자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늘

"공부는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는 교육철학을 강조했다.
 
대아고등학교 설립자 박종한 선생 다큐멘터리|반진정신이 만든 대한민국 교육 이야기


차문화 부흥에 바친 또 하나의 인생


아인 선생은 교육자에 머물지 않았다.

우리 전통 차(茶)문화를 되살리는 데도 평생을 바쳤다.

1978년 최범술 스님과 함께 한국차인회를 창립했고,

전남 해남의 일지암을 복원하는 데 앞장섰다.

1981년에는 진주 촉석루에서 '차의 날'을 제정하며 우리 차문화의 대중화에 힘썼다.

또한 하천다숙과 아인도방을 운영하며 전국의 차인들에게 오성다도를 전수했다.

그의 노력은 대한민국 차문화 부흥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육자이자 사상가로 남긴 철학


박종한 선생의 교육은 시험 성적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정직한 인격,

공동체 정신,

그리고 평생 배우는 자세를 강조했다.

남명의 경의정신을 현대 교육 속에 접목시키기 위해 남명제를 창설한 것도 이러한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독립운동가에서 교육자까지… 아인 박종한 선생의 위대한 여정


영원한 스승을 떠나보내다


2012년 5월 7일.

아인 박종한 선생은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사흘 뒤인 5월 10일.

대아고등학교 교정에서는 수많은 제자와 동문, 교육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엄수됐다.

당시 김진홍 교장(대아고 4회 졸업생)은 추도사를 통해 아인 선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늘 겸손했고 따뜻했으며 성실했고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많은 말보다 진실한 말을 하려 애썼고 원망 아닌 인내를 택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김 교장은 특히 아인 선생의 교육정신은 학교 건물보다 학생들 속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분의 교육적 열정을 품고 자라나는 우리의 학생들을 통해 우리는 그를 언제까지나 거듭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

"교육에 대한 사랑과 희생만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 속에 새기겠습니다."

라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이 추도사는 오늘날까지도 대아고 동문들이 가장 가슴 깊이 기억하는 글로 남아 있다.


아인 박종한 선생 주요 약력

1925년 경남 삼천포 출생
1938년 진주초등학교 졸업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현 진주고) 졸업
1944년 반진단 조직 및 항일운동, 부산형무소 투옥
1954년 재단법인 하천학원 설립
1966년 대아고등학교 초대 교장 취임
1977년 남명제 창설
1978년 한국차인회 창립
1979년 일지암 복원
1981년 차의 날 제정
1984년 대아고 서울대 합격생 전국 최다 배출(66명)
1989년 사단법인 차인회 창설 공로상(한국차인연합회)
1998년 차문화 공로상(한국다도협회)
1998년 초의상(초의문화재단)
2000년 명원차 문화 공로상(한국차인연합회)
2012년 별세
2013년 진주시민상 추서


맺음말


아인 박종한 선생은 총을 든 독립운동가에서 교단을 지킨 교육자로, 그리고 우리 차문화를 되살린 문화운동가로 평생을 살았다.

그가 남긴 '반진(般震)의 정신'은 일제에 맞선 저항을 넘어, 교육을 통해 사람을 세우고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시대정신이었다.

오늘날에도 대아고등학교 교정에는 그의 철학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수많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 그의 교육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아인박종한 #박종한선생 #대아고등학교 #대아고 #하천학원 #반진단 #대아중학교 #한국차인회 #오성다도회 #오민교육 #남명정신
 
전국 주유권, 편의점, 카페 등 10% 할인되는 모바일 쿠폰 '업플러스' 가입 안내
전국 주유권, 편의점, 카페 등 10% 할인되는 모바일 쿠폰 '업플러스' 가입 안내

문방주 기자 (jinju.news@daum.net)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