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은 반진단을 조직하며 우리 민족이 처음 세운 진震나라로의 귀환을 통한 진정한 독립을 꿈꾸었다. 1946년 진주 중안동 자택에서 그는 아시아인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 대아시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결의했다. ‘대아(大亞)’라는 이름은 제국주의 억압을 벗어나 아시아 전체의 연대와 자유를 염원하는 그의 의지를 상징한다.
대아 설립자 아인 박종한은 대아중고등학교 개교 후‘대아’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뜻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반진의 구국정신으로 학교가 탄생되었으나 학교의 목표하는 바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겠는가를 고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사회가 좌익 우익으로 나뉘고 정치가나 학원이 양단되어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민족의 운명을 넓은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입장에서 보고 있었다. 우리의 운명은 아시아의 운명과 같다. 아시아의 운명 속에 조국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의 문제는 단순히 한국 문제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같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힘을 모아 아시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시아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판단 속에 조국의 미래에 대한 방향 설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상은 손문의“중국의 운명은 아시아의 운명과 같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교가에“동트는 아시아의 새 등불”이라 했는데, 이는 모든 아시아의 공통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다.
1954년 2월, 박종한은 재단법인 하천학원을 설립하고, 1955년 2월 대아중학교를 인가받아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대아중학교는 진주 향교에서 운영하던 명륜중학교를 인수하며 출범했다. 하지만 학교 재정은 매우 열악해 교사 시설은 판자와 콜타르를 바른 종이 지붕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인 열악함 속에 있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상황에 학생들은 책상과 우산으로 공부 환경을 극복하려 애썼다.
강영규 초대교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진주향교에서 운영하던 명륜중학교를 박종한 교장이 인수했다고 했다.
“대아중학교 졸업생 명부를 보면 명륜중 1회, 명륜중 2회, 그다음에 대아중학교 1회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군마다 향교에서 경영하는 명륜중학교가 있었는데 진주에 있는 명륜중학교가 하동으로 가버리자 아인이 인수하여 대아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아 있던 명륜중학교 2, 3학년을 진주중학교, 남중학교, 용남중학교에 와이셔츠를 하나씩 사가지고 가서 부탁을 하여 졸업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대아중학교 인가가 났지만 명륜중학교에서 남은 2, 3학년을 졸업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단, 진주상고(현 진주정보고등학교가 아님)도 인수하였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운영할 수가 없었다. 당시 진주상고 학생들은 현 진주동명고등학교 전신인 해인고등학교와 진주농고(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로 전학시키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 2015년 강영규 전 대아고등학교장 증언
1954년 3월 인사동 판자루핑 교사 앞에서 대아중학교 야간부학생과 교직원 일동의 기념촬영 모습
(앞줄 가운데가 아인 박종한 교장과 효산 강영규 교감)
해방 직후의 교육 정책은 사학에 비교적 자유방임을 허용했지만, 국가 차원의 중등교육 투자 미비와 재정난은 대다수 사립학교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했다. 대아중학교도 예외 아니었다. 학생 수에 비해 공납금 납부가 부진해 재정적 긴축을 하며 간신히 운영되고 있었다.
훗날 아인 박종한 교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진주시 인사동에 판자 루핑집이 교사였어요. 루핑이란 기름종이에 콜타르를 발라놓은 것인데 못을 치며 못 구멍으로 비가 새서 엉망이 되곤 했습니다. 나는 중안동에 200평 되는 집이 있었는데 폭격을 맞고 없어져 버려 그 터를 팔아 학교를 짓고 나니 갈데가 없어 기숙사 내에서 가족과 살게 됐답니다. 그때는 이미 중고등학교 인가가 났지만 고등학교는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학교가 커져 신관 4층짜리 짓고 다시 인가를 냈어요. 너무 어려워 극히 절약을 하면서 살아야 하던 시절입니다. -『오민대』제5호(2005년) 인터뷰 중에서
대아중학교 제1회 졸업식장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박종한 교장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대아중학교는 교내에 양어장, 축사, 온실, 농원을 조성해 자급자족 운영 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양어장에서 생산된 자라와 미꾸라지는 일본까지 수출되며 1963년 경남도 양어센터 학교로 지정돼 주목받았다.
대아중학교 부설국민학교 입학기념 사진
1962년 10월 31일, 대아중학교 부설 국민학교를 설립하며 초등부터 고등교육까지 교육의 전당을 완성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대아국민학교는 경남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로 6학급 360명 규모였다. 집단적 획일주의를 탈피해 개별 지도와 천재 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외국어 교육과 예능·체육 및 실과 과목을 강화하는 등 선도적 교육 방식으로 명문 사립학교를 지향했다. 그러나 1968년 고등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육 여건 변화로 인해 아쉽게도 6년 만에 폐교되었다.
박종한과 초기 교사들은 “동트는 아시아의 새 등불”이라는 교가에 담긴 뜻처럼, 아시아 공동체의 연대와 조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당시 한국과 아시아가 처한 정치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넘어서, 넓은 시야와 연대 정신으로 국가 미래를 설계하고자 하는 구상이었다.
당시 인사동 교사 모습
대아중고등학교의 역사는 단순히 한 학교의 개교와 운영 이야기를 넘어서, 해방 후 대한민국과 아시아가 당면한 교육적·사회적 난맥을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교육자의 의지와 실천의 기록이다. 열악한 환경과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도 자립과 혁신을 추구한 이들의 도전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교훈으로 남는다.
대아학원의 역사는 화려한 시설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비가 새는 교실, 기숙사에서 생활한 설립자, 학교 운영을 위해 직접 양어장을 만들었던 교직원들의 헌신이 있었다.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교육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신념이었다. 오늘날 대아중학교와 대아고등학교가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사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인 박종한 선생이 남긴 교육철학과 시대를 앞선 비전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대아의 역사는 단순한 학교의 역사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조국과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었던 한 교육자의 숭고한 도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는 2016년 발간된 '대아고등학교오십년사'를 참고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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