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쉽게 고쳐 쓰는 정치 문서가 아니다. 헌법은 국가 권력의 한계를 정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상위 규범이다. 특히 대통령의 임기와 권력구조에 관한 헌법 조항은 정치적 유불리보다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과 헌정질서의 안정성을 기준으로 다뤄져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다시 불붙은 대통령 연임 개헌 논란은 개헌의 필요성과 별개로 헌법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현행 헌법 제128조 제2항은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개헌 제안 당시 재임 중인 대통령에게 효력이 없다고 규정한다. 이는 권력자가 자신의 재임 기간을 늘리거나 장기 집권의 길을 열기 위해 헌법을 바꾸는 것을 막기 위한 헌법적 안전장치다.
이 조항은 단순한 기술적 규정이 아니다. 권력의 자기 연장을 경계해 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헌정적 합의가 담긴 장치다.
‘국민의 선택’ 이전에 지켜야 할 헌법의 경계
조정식 국회의장이 현직 대통령의 연임 문제와 관련해 “국민 여론과 국민 선택의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정치권의 공방이 확산됐다.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라는 원칙은 분명하다. 헌법 개정 역시 국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된다. 그러나 ‘국민의 선택’이라는 말이 헌법이 정한 절차와 권력 제한의 원칙을 뛰어넘는 만능 논리가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선택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다수의 결정이 권력자의 임기 연장이나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헌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국민주권은 권력자의 뜻을 국민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권력이 헌법의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조 의장이 이후 현직 대통령의 연임은 개헌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해명했지만, 이미 정치권에서는 ‘정권 연장’과 ‘장기 집권’ 논란으로 번졌다.
정치적 논쟁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될 수 있다. 특히 국회의장의 발언은 개인적 견해를 넘어 국회의 헌정 운영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
4년 연임제 논의와 현직 대통령 적용은 구분해야
대통령 5년 단임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4년 연임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할 필요는 없다.
현행 5년 단임제는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권력의 장기화를 막는 장점이 있다. 반면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국정 동력이 약화되는 레임덕과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단절, 단기 성과 중심의 국정 운영이라는 문제도 반복돼 왔다.
4년 연임제는 유권자가 국정 성과를 평가해 한 차례 더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고, 정책의 연속성과 책임 정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현직 대통령에게 그 제도를 적용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개헌은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국가 운영의 틀이어야 한다. 따라서 대통령 연임제를 논의한다면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고, 충분한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
개헌의 출발점이 ‘누가 더 오래 집권할 수 있는가’가 된다면 헌법 개정은 국가 개혁이 아니라 권력 연장의 도구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헌법 제128조 제2항은 민주주의의 ‘브레이크’다
헌법 제128조 제2항은 권력의 확장을 막는 제도적 브레이크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기 쉽다. 대통령이 행정부를 이끌고 국가 정책과 외교·안보의 핵심 권한을 행사하는 구조에서는 임기 연장 논의가 곧 권력 집중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통령 연임제를 도입하려면 임기 문제만 바꿔서는 안 된다.
국회 권한 강화, 국무총리의 실질적 역할 확대, 대통령 권한 분산, 사법기관과 독립기관의 견제 기능 강화 등 권력 분산 장치가 함께 논의돼야 한다.
임기만 늘리고 견제 장치를 강화하지 않는다면 정책 연속성은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권력 집중의 위험도 함께 커질 수 있다.
개헌은 대통령의 임기 숫자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권력의 균형을 다시 설계하는 국가적 과제여야 한다.
‘술이부작’의 정신, 헌법 앞에서 더욱 필요하다
공자는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말했다.
“옛것을 전할 뿐 함부로 새로 만들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의 헌정 논의에 적용한다면 과거를 무조건 고수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오랜 역사와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원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 뒤, 필요한 변화는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헌법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변하면 헌법도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은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단기적 권력 계산에 따라 서둘러 추진해서는 안 된다.
공자의 또 다른 가르침인 “묵이식지(默而識之),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 역시 오늘의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의 경험을 묵묵히 되새기고, 배움에 싫증 내지 않으며,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치권이 헌법을 논한다면 먼저 헌정사의 실패와 민주주의가 치른 대가를 배워야 한다. 권력의 연장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 확대를, 정략적 유불리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우선해야 한다.
개헌은 정권의 과제가 아니라 국민의 과제다
대통령 연임 개헌을 둘러싼 공방이 민생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경제와 부동산, 일자리, 저출산과 고령화, 국가 경쟁력 등 국민이 체감하는 문제는 산적해 있다. 정치권이 개헌을 권력 공방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국민의 불신만 커질 것이다.
개헌이 필요하다면 국회 개헌특위를 중심으로 여야가 함께 논의하고, 학계와 시민사회, 국민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야 한다.
또한 개헌안에는 현직 대통령 불소급 원칙을 명확히 하고, 대통령 권한 분산과 국회의 책임 강화, 국민 기본권 확대 등 헌법의 실질적 개선 과제를 함께 담아야 한다.
헌법은 권력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약속이다.
정치권은 ‘누가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어떤 헌법이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권력은 바뀌지만 헌법의 원칙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공자의 ‘술이부작’ 정신처럼, 헌법을 바꾸려면 먼저 헌법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적 합의를 존중하지 않는 개혁은 발전이 아니라 후퇴가 될 수 있다.
지금 정치권에 필요한 것은 연임 논쟁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헌법의 경계를 지키고 민생의 답을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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