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지원금, 속도보다 원칙이 먼저다
민선 9기 출범 직후 경남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경쟁하듯 자체 민생지원금 지급에 나서고 있다.
의령군은 주민 1인당 50만 원의 민생지원금을 의령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기 위한 조례와 예산을 확정하고 이달 초 지급을 준비하고 있다. 통영시도 시민 1인당 33만 원의 지역화폐 지급을 추진하며 관련 조례와 추가경정예산안 심사를 앞두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지역화폐를 통해 골목상권 소비를 늘리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지역경제가 위축된 상황에서 단기적인 소비 진작과 소상공인 매출 회복을 위한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민생지원금은 ‘좋은 정책’이라는 구호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지원금의 규모와 지급 시기, 재원 마련 방식, 정책 효과에 대한 검증 없이 선거공약 이행을 이유로 대규모 현금성 지원을 서두른다면, 민생 정책은 언제든 선심성 공약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특히 지방재정 여건이 넉넉하지 않은 군 단위 지자체가 주민 전체에게 일률적으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민생 지원인가, 선거공약의 현금화인가
의령군은 기준일 현재 주민과 결혼이민자, 영주권자 등 약 2만 4,600명을 대상으로 1인당 50만 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관련 예산은 120억 원 규모다.
주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고 지역상품권 사용으로 지역 내 소비가 늘어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한 번 지급하면 끝나는 일회성 지원에 100억 원이 넘는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경제에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통영시 역시 약 11만 6,000명의 시민에게 1인당 33만 원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총사업비는 수백억 원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지원금의 필요성보다 정책 결정 과정이다.
민생지원금이 선거공약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재정 검토와 정책 효과 분석 없이 신속한 지급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행정은 정책의 우선순위보다 정치 일정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공약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공약 이행은 단순히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공약을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재정 여건과 정책 효과, 주민 간 형평성, 미래 세대의 부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전 주민 지급’이 가장 공정한가
보편 지급은 행정 절차가 간단하고 주민의 체감 효과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든 주민이 동일한 지원을 받는 것이 반드시 가장 효율적이거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소득과 재산, 경제적 어려움의 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지급하면 실제로 도움이 절실한 취약계층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도 같은 재원이 투입된다. 한정된 지방재정을 가장 필요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지역경제의 어려움이 특정 업종과 계층에 집중돼 있다면, 모든 주민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하는 것보다 폐업 위기에 놓인 소상공인, 고금리 부담을 안고 있는 자영업자, 취업 취약계층, 저소득 가구 등을 대상으로 맞춤형 지원을 하는 편이 정책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민생지원금의 핵심은 ‘몇 명에게 얼마를 주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어려움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줄이느냐’여야 한다.
선거가 끝나도 행정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통영시에서는 신·구 집행부와 지방의회 사이의 재정 주도권 문제, 의회 원 구성 지연 등이 지원금 지급 일정과 맞물리며 행정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민생지원금이 주민의 삶을 위한 정책이라면 선거 결과나 정치적 대립에 따라 지급 시기와 규모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전임 단체장의 정책이든 신임 단체장의 공약이든, 정책의 타당성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인 재정 분석과 주민의 필요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누가 먼저 추진했는가”, “누구의 공약인가”, “누가 재정 주도권을 갖는가”를 놓고 갈등한다면 피해는 결국 주민에게 돌아간다.
정책의 연속성이 무너지면 행정에 대한 신뢰도 함께 흔들린다.
지방자치는 선거를 통해 단체장을 바꾸는 제도이지만, 행정의 기본 원칙과 재정의 책임까지 매번 바꾸라는 뜻은 아니다.
지역마다 다른 지원금, 형평성 논란도 불가피
의령군 주민은 50만 원, 통영시 주민은 33만 원을 받는 반면 인근 지역 주민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
각 지자체가 독립된 재정과 권한을 가진 만큼 지원 정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재정 여건에 따라 민생지원금의 지급 여부와 액수가 크게 달라지면 주민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질 수 있다.
같은 경남에 살면서 주소지에 따라 수십만 원의 차이가 발생하는 상황을 단순히 ‘지방자치의 다양성’으로만 볼 수 있을지도 검토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지자체 간 경쟁이다.
한 지역이 지원금을 지급하면 다른 지역도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비슷한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이른바 ‘지원금 경쟁’이 시작되면 재정 여건보다 선거 여론과 정치적 부담이 정책을 좌우할 수 있다.
민생지원금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경쟁적으로 지급하는 순간, 민생 정책은 재정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일회성 소비보다 지속 가능한 지역경제가 중요하다
지역화폐와 상품권 지급은 단기간 소비를 늘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지원금이 소진된 뒤에도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일회성 소비 진작만 반복하면 지자체는 매년 새로운 지원금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결국 재정은 줄고, 장기적인 투자 여력도 약해질 수 있다.
지원금에 투입되는 대규모 예산은 지역 일자리 창출, 청년 창업, 소상공인 디지털 전환, 골목상권 경쟁력 강화, 지역산업 육성 등 지속 가능한 경제 기반을 만드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재정을 장기 투자에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 생계가 어려운 주민과 침체된 지역 상권을 지원하는 긴급 대책도 필요하다. 다만 단기 지원과 장기 투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금이냐, 투자냐’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긴급 민생 지원과 지역경제 체질 개선을 함께 설계하는 정책이다.
지원금은 정치가 아니라 재정 원칙으로 결정해야
의령군과 통영시의 민생지원금이 실제로 지역경제 회복과 주민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책의 선한 의도만으로 재정 부담과 형평성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자체는 지원금 지급 전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 지원금 재원은 어디에서 마련하는가.
-. 지급 이후 필수 복지·투자 사업에 영향은 없는가.
-. 지역화폐가 실제 골목상권 매출 증가로 이어지는가.
-. 가장 어려운 계층에 충분한 도움이 되는가.
-. 일회성 지급 이후 지역경제를 살릴 후속 대책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없이 ‘빠른 지급’만 강조한다면 민생지원금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선거공약의 현금화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민생은 중요하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
주민에게 돈을 지급하는 것은 쉽지만, 한 번 줄어든 지방재정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 경남의 지자체가 경쟁해야 할 것은 지원금 액수가 아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필요한 곳에 더 효과적으로 재정을 투입하고, 주민의 삶과 지역경제를 지속적으로 살릴 수 있느냐가 진짜 민생 경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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