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상담원은 ‘명단 속 담당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첫 번째 안전망이다
학교는 학생과 교직원이 안전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성희롱·성폭력 사안이 발생했을 때 학교가 얼마나 신속하고 전문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피해자의 회복과 조직에 대한 신뢰는 크게 달라진다.
경상남도교육청이 7월 30일부터 31일까지 김해교육지원청과 경남교육연수원에서 신규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원 180여 명을 대상으로 기본과정 교육을 실시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충상담원은 피해 상담과 보호 지원, 사안 처리 절차 안내, 2차 피해 예방 등 사건 초기 대응의 핵심 역할을 맡는다.
이번 교육은 성희롱·성폭력 발생 원인과 성평등한 조직문화 조성, 관련 법·제도, 실제 사례를 통한 대응 절차, 상담 기술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단순한 법령 전달을 넘어 실제 상황에서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하고, 어떤 절차로 사안을 처리해야 하는지를 익히도록 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교육을 한 번 실시했다고 해서 현장의 대응 역량이 자동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고충상담원 제도의 실효성은 ‘몇 명을 지정했는가’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상담원이 독립적이고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상담원 지정만으로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다
관련 법령과 지침에 따라 학교와 기관에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창구와 고충상담원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부 학교에서는 고충상담원이 본래 업무와 함께 상담 업무를 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담과 사안 처리는 높은 전문성과 상당한 시간, 심리적 부담을 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담당자가 제한된 시간 안에 여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건 초기 대응이 늦어지거나 피해자의 상황을 충분히 살피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상담원이 조직 내부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피해자가 상담을 요청했을 때 “비밀이 지켜질까”, “내 이야기가 학교 안에 알려지지 않을까”, “상담 이후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라는 불안을 느낀다면 상담창구가 있어도 실제 이용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고충상담창구는 단순한 행정 창구가 아니라 피해자가 가장 먼저 안전을 확인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2차 피해는 사건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은 사건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사건을 알리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설명해야 하거나, 주변의 의심과 소문, 부적절한 질문, 책임 전가, 관계 악화가 이어질 경우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왜 그때 바로 말하지 않았나”, “오해가 아니냐”,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말은 사실 확인을 위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부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고충상담원에게 필요한 것은 규정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불필요한 반복 진술을 줄이며, 비밀을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상담 역량이 중요하다.
특히 사건 초기에는 상담원의 한마디와 첫 대응이 피해자의 신고 지속 여부와 회복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교육이 사례 중심의 상담 훈련과 2차 피해 예방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후 처리’보다 예방 중심 조직문화가 중요하다
성희롱·성폭력 대응은 사건이 발생한 뒤 조사하고 징계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직문화를 바꾸는 예방 체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학교 구성원들이 성인지 감수성을 이해하고, 일상적인 언행과 조직 내 권력관계가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방교육이 매년 같은 자료를 시청하거나 형식적으로 교육 이수 여부만 확인하는 방식에 그친다면 실제 조직문화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예방교육은 ‘교육을 했는가’보다 ‘교육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학교별로 고충상담창구가 쉽게 확인되는지, 상담 절차와 보호 조치가 구성원에게 충분히 안내되는지, 피해자 보호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성평등한 학교문화는 특정 담당자 한 명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교 관리자와 교직원, 학생, 교육행정기관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
고충상담원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야
경남교육청은 기본과정에 이어 8월 말 고충상담원 220여 명을 대상으로 심화과정을 운영할 계획이다.
기본교육과 심화교육을 연계해 상담과 사안 처리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방향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교육의 효과를 높이려면 일회성 연수에 그치지 않는 상시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고충상담원이 실제 사건을 접했을 때 즉시 전문가의 자문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복잡하거나 중대한 사안은 교육지원청과 외부 전문가가 신속하게 지원해야 한다.
경남교육청이 외부 전문가를 파견하고, 성고충심의위원회를 교육지원청으로 이관해 운영하겠다고 밝힌 것도 현장의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지원이 실제 현장에서 신속하게 작동하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상담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거나, 사건 발생 이후 담당자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고충상담원은 ‘혼자 해결하는 담당자’가 아니라 교육청과 학교, 전문기관이 함께 지원하는 대응 체계의 일부여야 한다.
이제는 ‘교육 횟수’보다 ‘현장 변화’를 평가해야
경남교육청의 이번 교육은 신규 고충상담원의 전문성을 높이고, 학교 현장의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교육 참여 인원과 교육 횟수만으로 성과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피해자가 상담창구를 쉽게 찾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가.
-. 상담 내용과 개인정보가 실질적으로 보호되는가.
-. 고충상담원이 충분한 시간과 전문성을 갖고 업무를 수행하는가.
-. 사건 발생 시 피해자 보호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지는가.
-. 사안 처리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되는가.
-. 교육 이후 학교의 조직문화와 구성원의 인식이 실제로 개선됐는가.
이 기준을 충족할 때 고충상담원 제도는 형식적 지정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안전망이 될 수 있다.
학교의 신뢰는 사건을 숨기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학교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조직의 평판이 아니라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이다.
사건을 축소하거나 내부적으로 조용히 해결하려는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피해를 키울 가능성이 있다.
학교의 신뢰는 사건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보호하고, 절차를 투명하게 운영하며, 2차 피해를 막고, 재발 방지 대책을 실질적으로 실행할 때 신뢰는 쌓인다.
경남교육청의 고충상담원 역량 강화 교육이 단순한 직무 연수가 아니라 학교 현장의 대응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고충상담원은 명단에 이름만 올리는 담당자가 아니다.
피해자가 처음 도움을 요청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며, 학교가 안전한 공동체인지 판단하게 하는 첫 번째 안전망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상담원을 지정했다’는 행정적 완료가 아니라, 피해자가 실제로 보호받을 수 있는 전문성·독립성·상시 지원체계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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