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는 규정 위반을 인정하고도 왜 책임을 묻지 않는가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시장과 서울·인천교육감 선거 무효 소청에 대해 선관위는 선거관리 규정 위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선거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며 기각(棄却)했다. 부산시장과 경기지사 등 12건의 소청은 보정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하(却下)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다. 유권자가 투표할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중단됐다면, 그 자체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선거관리 실패다.
물론 선거무효를 판단하려면 단순한 규정 위반을 넘어 실제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당락이 바뀌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선거관리기관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투표소에 찾아갔는데 투표용지가 없어 기다려야 했다면, 또는 투표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면 그 순간 침해된 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투표권 행사 자체다.
더욱이 이번 사태가 일부 현장의 단순 실수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선거관리기관은 투표율과 유권자 수, 선거인 명부 등을 바탕으로 충분한 투표용지를 준비하고 비상 상황에 대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이것은 선거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다.
“결과에 영향 없다”는 논리가 책임 면죄부가 돼서는 안 된다
선관위가 규정 위반을 인정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기각이라는 결론만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누가 어떤 판단을 잘못했는지, 재발 방지책은 무엇인지 국민에게 납득할 만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판단과 선거관리 책임은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투표용지가 부족했지만 결국 투표를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거관리기관이 사전에 충분히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면 그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관위가 “규정 위반은 맞지만 결과에는 영향이 없었다”고 판단했다면 국민에게 더욱 상세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어느 정도의 투표 중단이 있었고, 몇 명의 유권자가 영향을 받았으며, 투표권 행사에 실질적인 제한이 없었다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공개해야 한다.
선거의 공정성은 결과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이 투명하고 정확해야 결과에 대한 국민의 승복도 가능하다.
소청 각하 역시 ‘절차의 문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부산시장과 경기지사 등 12건의 소청이 보정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하된 것도 제도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소청 절차에는 정해진 형식과 요건이 필요하다. 당사자가 보정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면 각하할 수밖에 없는 법적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실질적인 선거관리 문제가 있었는지 여부가 절차적 흠결 때문에 제대로 심리조차 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거 불복 제도는 후보자의 정치적 불복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선거 과정의 위법·부당성을 바로잡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청인의 절차상 미비가 명백한 경우에는 각하하더라도, 국민적 관심이 큰 선거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사실관계 조사와 설명을 통해 의혹을 해소하는 적극적인 행정이 필요하다.
선관위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신뢰’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신뢰다.
44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통영시장 선거처럼 초접전 지역에서는 단 한 표의 관리 실수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투표용지 부족이나 개표 과정의 오류 논란이 반복될수록 국민은 “정말 제대로 관리된 선거였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따라서 선관위는 이번 결정을 단순히 ‘소청 기각’이라는 법적 결론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첫째, 투표용지 수요 예측 시스템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둘째, 투표용지 부족과 같은 선거관리 사고에 대한 실시간 대응 매뉴얼과 예비 물량 확보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와 책임 소재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넷째, 선거소청 제도가 실질적인 권리구제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절차와 보정 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
다섯째, 무엇보다 선거관리기관 스스로의 내부 통제와 책임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선거소청은 선관위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각이나 각하된 경우에도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법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결국 국민이 원하는 것은 특정 후보의 승패가 아니다.
정확한 선거, 공정한 선거,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선거다.
이번 사태에서 선관위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다.
“당락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판단은 선거 결과에 관한 결론일 뿐, 선거관리 실패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투표용지 한 장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선거관리라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선관위가 진정으로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겠다면 이번 결정을 계기로 스스로의 관리체계를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투표이고, 선거의 마지막 보루는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그 신뢰를 지키는 책임은 선관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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