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경은 단순히 월경이 끝나는 생리적 사건이 아니다. 여성의 몸에서 에스트로겐을 비롯한 호르몬 환경이 크게 바뀌는 중요한 전환점이며, 뇌 건강과 심혈관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다.
그렇다면 폐경 이후 부족해진 여성호르몬을 보충하는 호르몬 대체요법(HRT)이 치매 위험에도 영향을 미칠까.
최근 영국 바이오뱅크(UK Biobank) 여성 18만3,450명을 대상으로 평균 13.3년 동안 추적한 연구가 이 질문에 새로운 단서를 제시했다.
연구 결과만 놓고 보면 HRT를 사용한 여성은 사용하지 않은 여성보다 전체 치매 발생 위험이 약 10% 낮았다(HR 0.90).
하지만 이 숫자만 보고 “HRT가 치매를 예방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이번 연구의 진짜 의미는 전체 여성에게 동일한 효과가 나타났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폐경의 유형과 평생 에스트로겐 노출량, APOE ε4 유전자 보유 여부, 그리고 HRT를 시작한 나이에 따라 연관성이 달라졌다는 점에 있다.
■ 18만3천 명을 13년 이상 추적…치매 3,948건 분석
이번 연구는 영국 바이오뱅크에 참여한 폐경 후 여성 18만3,45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평균 추적 기간은 13.3년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약 243만 인년(person-years)의 자료가 축적됐다.
추적 과정에서 확인된 치매 사례는 3,948건이었다.
연구진은 HRT 사용 여부와 전체 치매 및 치매 하위 유형의 발생 관계를 분석하면서 폐경 유형, 평생 에스트로겐 노출량, APOE ε4 유전자, HRT 시작 연령 등을 함께 살펴봤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연관성(association)’이다.
이번 연구는 HRT를 복용하면 치매가 예방된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한 임상시험이 아니다.
따라서 결과를 “HRT가 치매를 10% 예방한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HRT 사용 여성에서 치매 발생 위험이 약 10% 낮게 관찰됐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46~56세 시작’
이번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HRT를 언제 시작했느냐다.
연구에서는 46~56세에 HRT를 시작한 여성에서 치매 위험과의 유리한 연관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이른 폐경 전후 또는 초기 폐경기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이른바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 또는 ‘critical window’ 가설과 맥락을 같이한다.
왜 시점이 중요할까.
에스트로겐은 뇌에서 시냅스 기능, 신경전달물질 대사, 포도당 이용, 혈액뇌장벽, 뇌혈관 기능, 신경염증 등에 관여한다.
폐경으로 에스트로겐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기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는 것과,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뇌의 생물학적 상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호르몬이 부족해진 뒤 언제 보충하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것 역시 이번 연구 하나만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결론은 아니다.
■ 자연 폐경보다 ‘수술로 인한 폐경’에서 연관성 더 강했다
연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결과는 폐경 유형이었다.
HRT와 치매 위험 사이의 낮은 연관성은 자연 폐경 여성보다 수술적 폐경을 경험한 여성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수술적 폐경은 일반적으로 양쪽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 등으로 난소의 호르몬 생성이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발생할 수 있다.
연구에서는 수술적 폐경 여성에서 HRT 사용과 치매 위험의 연관성이 HR 0.74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여성에서 관찰된 HR 0.90보다 더 낮은 수치다.
다만 여기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연구진은 수술적 폐경 여성에게 에스트로겐 단독 HRT가 처방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했다.
반면 자궁이 있는 자연 폐경 여성은 일반적으로 자궁내막 보호를 위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토겐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UK Biobank 자료에는 HRT의 구체적인 제형, 용량, 투여 경로 등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술적 폐경이면 HRT가 더 좋다”거나 “에스트로겐 단독 치료가 치매를 예방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 APOE ε4 보유자에서 더 강한 연관성
이번 연구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변수는 APOE ε4 유전자다.
APOE ε4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치매 위험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전적 위험 요인이다.
연구에서는 APOE ε4 보유 여성에서 HRT 사용과 전체 치매 위험 감소의 연관성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APOE ε4 보유자의 HRT 관련 HR은 0.87이었다.
연구진은 APOE와 에스트로겐이 시냅스 가소성, 혈액뇌장벽, 포도당 대사, 신경염증 등 일부 생물학적 경로에서 서로 영향을 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결과 역시 신중하게 봐야 한다.
연구에서는 APOE ε4와 HRT 사이의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호작용이 확인되지 않았다.
즉, “APOE ε4 보유자에게 HRT 효과가 확실히 더 크다” 고 결론 내릴 단계는 아니다.
이번 결과는 앞으로 더 정밀하게 연구해야 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 평생 에스트로겐 노출이 적었던 여성에서도 차이
평생 자연적으로 경험한 에스트로겐 노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에서도 HRT와 치매 위험 감소 사이의 연관성이 더 강했다.
해당 그룹의 HR은 0.84였다.
이는 여성의 치매 위험을 단순히 현재 나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초경 연령과 폐경 연령, 폐경 유형 등은 여성의 일생 동안 에스트로겐에 노출되는 기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폐경 건강관리에서는 “현재 몇 살인가”뿐만 아니라 “평생 호르몬 노출 환경이 어떠했는가” 라는 관점도 중요해질 가능성이 있다.
■ 그렇다면 HRT는 치매 예방약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아니다. 이번 연구만으로 HRT를 치매 예방 목적으로 복용하라고 권고할 수는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번 연구는 관찰연구다.
HRT를 복용한 여성과 복용하지 않은 여성의 치매 발생을 장기간 비교했지만, 연구자가 무작위로 HRT를 투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HRT를 선택한 여성에게 다른 건강·생활습관·사회경제적 특성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이를 흔히 건강한 사용자 편향(healthy-user bias) 문제라고 설명한다.
연구진 역시 이번 결과가 인과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했다.
특히 HRT 제형과 용량, 투여 방식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고, 연구 참가자가 유럽계 및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여건이 좋은 집단에 치우쳐 있다는 한계도 있다.
■ 과거 연구에서는 오히려 치매 위험 증가 결과도 있었다
이번 결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 연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여성건강이니셔티브 기억연구(WHIMS)다.
WHIMS에서는 65세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토겐을 함께 사용하는 HRT와 치매 발생 증가가 관찰된 바 있다.
반면 다른 관찰연구에서는 HRT가 치매 위험 감소와 관련 있다는 결과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연구가 맞는 것일까.
현재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가장 합리적인 답은 “HRT의 효과는 치료 시점과 여성의 특성, 치료 방식 등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연구는 과거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언제 시작했는가’라는 문제를 강조한다.
■ 이번 연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획일적 처방’이라는 사고방식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의미는 HRT를 무조건 좋은 치료 또는 나쁜 치료로 나누는 접근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여성마다 폐경 시점이 다르고, 자연 폐경인지 수술적 폐경인지도 다르다.
평생 에스트로겐 노출량도 다르며, 유전적 위험도 역시 다르다.
따라서 앞으로는 “HRT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단순한 질문보다 “누가, 언제, 어떤 제형으로, 어떤 목적에서 HRT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 하지만 ‘46~56세’라는 숫자를 처방 기준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번 연구에서 46~56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이 나이에 HRT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HRT는 폐경 증상, 골다공증 위험, 심혈관질환 위험, 유방암 및 자궁내막 관련 위험 등 여러 요소를 종합해 결정해야 하는 치료다.
또한 개인의 병력과 사용하는 호르몬 종류, 투여 방법 등에 따라 위험과 이익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치매 예방만을 목적으로 HRT를 임의로 시작하거나 중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번 연구는 처방 지침이라기보다 향후 개인 맞춤형 폐경 치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연구로 보는 것이 맞다.
■ 건강칼럼의 결론…‘호르몬’보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과 개인화다
이번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상당히 명확하다.
첫째, UK Biobank의 대규모 분석에서 HRT 사용 여성은 비사용 여성보다 전체 치매 위험이 약 10% 낮게 관찰됐다.
둘째, 이러한 연관성은 모든 여성에게 똑같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셋째, 46~56세에 HRT를 시작한 여성에서 가장 뚜렷한 연관성이 관찰됐다.
넷째, 수술적 폐경 여성, APOE ε4 보유 여성, 평생 에스트로겐 노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여성에서 더 강한 연관성이 관찰됐다.
그러나 다섯째, 이 연구는 관찰연구이므로 HRT가 치매를 예방한다고 증명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이번 연구가 말하는 핵심은 ‘HRT가 치매를 막는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폐경 이후의 호르몬 치료는 여성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치료 시점과 개인의 위험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대규모 관찰연구의 숫자를 넘어, 실제로 HRT가 특정 여성군의 치매 위험을 낮추는지를 확인하는 무작위대조시험(RCT)이다.
치매는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따라서 하나의 약이나 하나의 호르몬만으로 그 위험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번 연구는 그 복잡한 퍼즐 가운데 하나의 조각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여성의 뇌 건강에서 ‘무엇을 치료할 것인가’만큼 중요한 질문은 ‘언제 치료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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