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거상 관광루트, ‘부자 전설’만 팔아서는 안 된다…경남 관광의 승부수 될까
경상남도가 삼성·LG·효성 창업주의 발자취와 기업가 정신, 솥바위 전설 등 진주·의령·함안을 하나의 관광권으로 묶는 ‘K-거상 관광루트’ 조성에 나섰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효성 창업주 만우 조홍제의 발자취와 의령 솥바위의 ‘부자 전설’을 연결해 경남만의 차별화된 관광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매력적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대표 기업가들이 한 지역권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는 사실은 다른 지역에서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관광자산이다.
특히 의령 솥바위(鼎巖)에는 ‘반경 20리 안에서 큰 부자가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실제 인근에서 이병철·구인회·조홍제 창업주가 태어났다는 점 때문에 이미 관광 스토리로서 상당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경남도는 올해 14억3천만원을 투입해 공동브랜드를 만들고 아카이브 구축, 체험형 콘텐츠 개발 등을 추진한다.
하지만 여기서 냉정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K-거상’이라는 이름만으로 관광객이 진주와 의령, 함안에서 돈을 쓰며 하루 이틀 더 머물 것인가.
이 사업의 진짜 성패는 브랜드 개발이 아니라 바로 이 질문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다.
◆ ‘삼성·LG·효성’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관광에서는 양날의 검
K-거상 관광루트의 가장 큰 장점은 이미 국민에게 알려진 인물과 기업의 이야기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지역 관광은 먼저 관광객에게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K-거상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삼성·LG·효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대부분의 국민이 기업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관광 마케팅에서 상당한 강점이다.
그러나 유명 기업의 이름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관광상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 접근하면 ‘기업 창업주 생가를 둘러보는 역사 탐방’이라는 다소 딱딱한 관광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관광객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의 연혁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K-거상은 훌륭한 역사자료일 뿐,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이 되기 어렵다.
◆ 솥바위 전설도 ‘신비한 이야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K-거상 관광루트의 가장 강력한 콘텐츠는 오히려 기업가들의 생가보다 의령 솥바위일 수 있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큰 부자가 태어난다’는 전설과 실제 기업 창업주들의 출생지가 인근에 있다는 이야기는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특히 SNS 시대에는 이런 스토리가 강력하다.
사진을 찍고 싶고,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싶고,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은 이야기가 관광객을 움직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부자 기운 받기’ 같은 자극적인 콘텐츠만 강조하면 K-거상의 품격이 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기업가 정신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젊은 관광객에게는 재미없는 산업역사 교육으로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두 요소의 균형이다.
솥바위의 재미있는 전설과 창업주들의 실제 도전과 실패, 그리고 성공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야 한다.
‘부자가 되는 바위’에서 시작해 ‘어떻게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 탄생했는가’로 이야기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 지역이 ‘따로 놀 가능성’이다
K-거상 관광루트의 성공을 가로막을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는 콘텐츠 자체가 아니라 행정구역의 경계다.
진주에는 구인회 창업주 관련 자원이 있고, 의령에는 솥바위와 이병철 생가가 있으며, 함안에는 조홍제 창업주 관련 자원이 있다.
문제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진주·의령·함안이라는 행정구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여행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가 자기 지역 관광객 숫자와 예산 확보에 집중한다면 ‘공동브랜드’는 이름만 공동일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세 지역이 관광객의 이동 동선과 소비를 함께 설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의령 솥바위 → 이병철 생가 → 진주 승산부자마을 → 구인회 관련 공간 → 함안 조홍제 생가 → 지역 맛집·시장 → 숙박 으로 연결되는 식이다.
관광객이 한 지역만 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 지역을 하나의 여행으로 소비하도록 만드는 구조가 필요하다.
◆ 생가를 못 보면 관광루트의 핵심이 흔들린다
관광상품의 현실적인 약점도 짚어야 한다.
관광객에게 가장 매력적인 콘텐츠 중 하나는 창업주들이 실제로 태어나고 성장했던 공간이다.
그런데 핵심 공간 가운데 일부가 충분히 개방되지 않는다면 관광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에는 한계가 생긴다.
생가를 직접 볼 수 없다면 주변 동상이나 안내판, 사진 자료만으로 관광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경남도와 해당 지자체는 단순히 시설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말고 관련 기업·재단·유족 등과 장기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전면 개방이 어렵다면 예약제·해설 프로그램·디지털 트윈·AR 콘텐츠 등 대체 수단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광객이 ‘실제 창업주의 흔적을 경험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 14억3천만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올해 사업비는 14억3천만원이다.
공동브랜드 개발과 아카이브 구축, 체험형 콘텐츠 개발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사업이 끝난 뒤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14억3천만원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14억3천만원으로 지역에 얼마의 관광소비를 만들어냈는가?”
공동브랜드 로고가 만들어지고 홍보영상이 제작됐다고 해서 관광정책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성과를 판단하려면 최소한 ▲ 관광객 수 ▲ 평균 체류시간 ▲ 숙박객 증가율 ▲ 1인당 관광지출액 ▲ 지역화폐 사용액 ▲ 지역 음식점·카페 매출 변화 ▲ 관광상품 판매액 ▲ 재방문율 등을 추적해야 한다.
특히 당일 방문객과 숙박 관광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10만 명이 잠깐 방문하는 것보다 3만 명이 숙박하고 지역에서 식사하고 쇼핑하는 것이 지역경제에는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K-거상’을 젊은 세대가 찾게 만들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이라는 소재는 자칫 중장년층 중심의 역사관광으로 굳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콘텐츠 혁신이 필요하다.
예컨대 창업주들의 실제 삶을 기반으로 한 미션형 투어, 모바일 스탬프투어, AR 역사체험, 창업 아이디어 챌린지, 트레일러닝과 같은 스포츠 콘텐츠를 결합할 수 있다.
특히 ‘부자 전설’을 단순한 민간전승으로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기업가 정신 테스트’, ‘K-거상 창업 미션’, ‘부자로드 인증투어’ 등 참여형 콘텐츠로 발전시킨다면 SNS 확산 가능성도 높아진다.
관광객이 설명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 결국 K-거상의 승부처는 ‘브랜드’가 아니라 ‘경제성’이다
K-거상 관광루트는 분명 경남이 가진 독특한 관광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시도다.
삼성·LG·효성이라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의 창업주들이 경남이라는 공간에서 연결된다는 사실은 다른 지역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스토리다.
하지만 좋은 소재가 반드시 좋은 관광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가를 보고, 솥바위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관광으로 끝난다면 K-거상은 또 하나의 지역 관광사업에 머물 수 있다.
반대로 세 지역을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하고 숙박과 음식, 체험과 쇼핑까지 묶는다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체류형 관광상품으로 발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창업주들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와 도전, 당시 지역사회와 산업환경까지 보여준다면 단순한 ‘부자 관광’을 넘어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관광콘텐츠로 격을 높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K-거상’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크게 홍보하느냐가 아니다.
관광객이 왜 진주에서 시작해 의령을 거쳐 함안까지 가야 하는지, 왜 하루가 아니라 이틀을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경남이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로고가 아니다.
14억3천만원을 들여 만든 브랜드가 지역경제에 어떤 숫자를 남길 것인가다.
K-거상 관광루트가 ‘부자 전설’을 소비하는 관광으로 끝날지, 아니면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역사를 지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바꿀지는 이제부터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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