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경감급 전국 순환인사, ‘향찰’ 근절인가 수사력 훼손인가
경찰청이 이른바 '장윤기 사건'으로 불거진 부실 수사와 지역 연고 유착(일명 향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감급(수사팀장 및 실무자급)까지 타 시·도 순환근무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총경·경정급 중심으로 시행되던 순환인사를 수사팀장과 실무자급인 경감까지 확대해 지역 토착세력과 경찰 간 유착 가능성을 끊겠다는 취지다.
명분은 분명하다.
경찰관이 한 지역에서 장기간 근무하면서 형성한 학연·지연·혈연과 각종 인적 네트워크가 수사와 단속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차단해야 한다. 특히 경찰의 수사권과 현장 권한이 커진 상황에서 수사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문제는 방법이다.
‘향찰(鄕察)을 없애겠다’는 명분만으로 전국의 경감급 경찰관을 대규모로 이동시키는 것이 과연 정답인가.
경감 3만 명을 움직이는 것은 ‘인사’가 아니라 경찰 시스템의 재편이다
경감급은 경찰 조직에서 단순한 중간관리자가 아니다.
수사팀장 등 현장 지휘와 사건 처리를 담당하면서 조직의 실질적인 허리 역할을 하는 계층이다. 이들을 전국 단위 순환인사 대상으로 확대할 경우 그 규모만 약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거론된다.
이 정도 규모라면 몇 차례 인사발령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수사부서의 인력 배치, 사건 인수인계, 지역 정보망, 전문수사 역량, 가족의 주거와 자녀 교육, 관사와 이사비용까지 경찰 조직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수사 사건은 인사발령에 맞춰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개월 또는 수년간 진행된 사건을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면 수사의 연속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역 특성, 사건 관계인의 성향, 참고인과 제보자의 신뢰관계 등은 인사기록 한 장으로 인수인계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경찰이 유착을 끊겠다며 사람을 이동시켰는데, 정작 수사의 전문성과 책임성이 떨어지는 역효과가 나타난다면 정책의 목적과 결과가 정반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오래 근무하면 유착’이라는 공식부터 다시 봐야 한다
이번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유착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 지역에 오래 근무한다고 모두 유착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았다고 유착 가능성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유착은 결국 개인의 부정행위와 이를 감시하지 못하는 조직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경찰관이 지역 유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면 엄정하게 조사하고 징계해야 한다. 내부 고발자가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묵살했다면 지휘라인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통제장치를 제대로 강화하지 않은 채 “오래 근무했으니 옮기자”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이는 근본적인 개혁이라기보다 가장 손쉬운 인사행정에 기대는 것에 가깝다.
더구나 유착이 가능한 영역은 수사뿐만이 아니다.
인허가, 단속, 정보, 생활안전 등 지역사회와 직접 접촉하는 다양한 업무에서 이해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 역시 모든 경찰관을 똑같이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착 위험도가 높은 직무와 조직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수사경찰에게 순환인사라는 ‘또 하나의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
현장의 수사경찰이 이미 겪고 있는 문제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수사부서는 업무 강도가 높고 사건 책임도 크다. 그런데 여기에 장거리 순환근무까지 더해진다면 우수 인력이 수사부서를 기피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경찰청이 원하는 것은 공정한 수사인데, 현장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수사 인력의 이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경감급은 장기간 경찰 조직에서 근무해온 연령대가 많다.
자녀 교육, 주거, 배우자의 직장, 부모 부양 등 생활 기반이 이미 지역에 형성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에게 타 시·도 강제 이동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면서 “조직을 위해 감수하라”고만 한다면 조직 구성원의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 개혁은 경찰관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민에게 더 나은 치안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경찰 조직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전국 순환보다 ‘위험 직무 집중 순환’이 먼저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권역 내 제한적 순환인사가 현실적이다.
생활권을 완전히 벗어난 전국 단위 이동보다는 동일 시·도경찰청 또는 인접 권역을 중심으로 순환시키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지역 유착 가능성을 낮추면서도 가족과 주거에 미치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둘째, 직무별 차등 순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모든 경감급을 일률적으로 이동시킬 것이 아니라 수사·단속·인허가 등 이해관계가 집중되는 보직을 중심으로 순환을 강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전문성이 중요한 분야는 장기근무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
경찰관의 업무를 모두 똑같은 위험도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디지털 감찰을 강화해야 한다.
사건 처리 과정, 특정인에 대한 반복적인 사건 배당, 수사 개입, 민원 처리 과정 등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자동으로 감찰 대상에 올리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보다 부당한 개입이 발생하면 흔적이 남고 반드시 적발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훨씬 강력한 통제장치다.
넷째, 비위 경찰관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인사조치를 해야 한다.
유착이나 청탁이 확인됐는데도 조직 내부에서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된다면 아무리 순환인사를 실시해도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유착이 확인된 경찰관에게는 단순 전보가 아니라 재발 가능성을 차단하는 실질적인 인사상 불이익을 줘야 한다.
순환인사를 한다면 ‘보상’부터 제시해야 한다
순환인사를 강제하려면 경찰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
관사 확보, 이사비 지원, 교통비 지원 등 현실적인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 수사부서와 기피부서 근무자에게는 승진 가점이나 특진 기회 확대 등 명확한 보상체계도 필요하다.
희생만 요구하고 보상은 뒤로 미루는 인사개혁은 오래갈 수 없다.
경찰 조직의 허리를 대규모로 움직이려 한다면 정책 시행 전에 반드시 현장 의견을 듣고 시범사업을 통해 부작용을 검증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시행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수정하겠다는 방식은 경찰 조직에는 너무 위험하다.
‘향찰’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력까지 끊어서는 안 된다
이번 논란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다.
지역 유착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
경찰이 지역사회와 지나치게 가까워져 수사 공정성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국민이 용납할 이유가 없다. 경찰의 수사권이 확대될수록 내부 통제는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
그러나 ‘유착 가능성’과 ‘장기근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경찰관을 전국으로 흩어놓는다고 해서 부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사관의 전문성과 사건의 연속성이 무너지고, 가족의 생활 기반까지 흔들리면서 우수 인력이 수사부서를 떠나는 결과가 나타난다면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결국 이번 경찰 순환인사의 핵심은 몇 명을 어디로 옮기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유착을 차단했는지, 수사 신뢰도는 높아졌는지, 사건 처리 기간은 늘어나지 않았는지, 우수 수사인력은 이탈하지 않았는지를 객관적인 지표로 검증해야 한다.
경찰개혁은 ‘사람을 옮기는 개혁’이 아니라 ‘부당한 영향력이 작동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개혁’이어야 한다.
향찰 근절이라는 명분은 충분하다.
하지만 명분이 강할수록 방법은 더 정교해야 한다.
3만 경감급을 움직이는 거대한 인사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경찰청은 먼저 국민에게 답해야 한다.
“이 인사가 정말 유착을 없애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유착을 감시하고 통제할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인사이동으로 대신하려는 것인가.”
그 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이번 순환인사는 개혁이 아니라 또 하나의 행정실험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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