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SMR 2.0, 4조7천억 청사진보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
경남도가 지난 10일 브리핑을 열고 경남을 세계 최고 수준의 소형모듈원자로(SMR) 생산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한 ‘경남 SMR 글로벌 육성전략 2.0’을 내놓았다. 총사업비만 4조 6,990억 원에 이르는 대형 프로젝트다. 목표도 크다. 오는 2035년까지 글로벌 SMR 제조시장 점유율 60%, 기술 자립도 100%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숫자만 보면 경남의 미래산업 전략 가운데서도 가장 야심찬 청사진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SMR은 단순히 원전을 작게 만드는 산업이 아니다. 원자로 설계부터 핵심 기자재, 제작, 시험·인증, 안전성 검증, 운영, 유지보수까지 고도의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종합산업이다. 따라서 ‘경남이 제조를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세계 SMR 시장의 60%를 차지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전략의 성패는 결국 제조 경쟁력을 얼마나 원천기술과 시장 지배력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조 강국 경남, 그러나 ‘하청 제조기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경남의 가장 큰 장점은 분명하다.
창원을 중심으로 한 기계·조선·방산·플랜트 산업의 생산 기반과 숙련된 제조 생태계가 이미 구축돼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한 기업들의 원전 기자재 제작 역량 역시 경남이 SMR 산업을 선점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특히 2028년을 목표로 추진되는 SMR 전용 공장과 창원국가산단 지원센터는 제조 생태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경남은 SMR을 만드는 곳인가, SMR 산업의 주도권을 갖는 곳인가?”
두 질문의 답은 전혀 다르다.
설계와 핵심 원천기술, 노형 인증, 핵심 특허를 다른 나라와 기업이 보유하고 경남이 제작과 조립만 담당한다면 산업 규모가 커져도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은 외부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경남이 진정한 SMR 글로벌 허브가 되려면 제조 능력을 넘어 설계·시험·인증·핵심부품·운영기술까지 연결되는 밸류체인을 구축해야 한다.
4조7천억 원, ‘총사업비’보다 중요한 것은 국비 확보의 현실성이다
또 하나의 관문은 돈이다.
4조 6,990억 원이라는 사업비는 경남도의 의지만으로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특히 상당 부분을 국비로 확보해야 한다면 정부의 산업정책과 국가 예산 편성 방향에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국비를 많이 달라”고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다.
SMR을 방산·조선·우주항공·AI 데이터센터·에너지 안보와 연결해 국가사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경남이 가진 산업구조를 생각하면 오히려 기회는 분명하다.
SMR 선박은 조선산업과 연결할 수 있고, 핵추진 선박과 잠수함은 방산산업과 연결할 수 있다. 우주항공 분야의 미래 에너지원과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 역시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다.
결국 경남도가 해야 할 일은 사업별로 국비를 나눠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SMR을 중심으로 경남의 제조·방산·조선·우주항공·에너지 산업을 묶어 국가산업 프로젝트로 만들겠다”는 논리를 중앙정부에 제시하는 것이다.
‘세계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표준’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중심의 SMR 전용 제조시설 구축은 상징성이 크다. 그러나 ‘세계 최초’라는 표현에 지나치게 기대서는 안 된다.
SMR 시장은 이제 막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단계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국 기업들도 설계와 상용화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결국 시장을 선점하는 기업은 가장 먼저 공장을 지은 기업이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기술과 가격 경쟁력, 안전성, 공급망을 가진 기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경남은 제조공장을 짓는 것과 동시에 시험·인증 인프라를 강화하고 국제 표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특히 한·미·일 밸류체인 협력 역시 단순한 기술 협력이나 기업 간 교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경남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의 어느 위치에 들어갈 것인지, 어떤 핵심부품과 기술을 확보할 것인지, 공동 특허와 지식재산권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가장 위험한 병목은 ‘사람’이다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에서 흔히 놓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인력이다.
SMR 산업은 일반 제조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설계·원자력 안전·품질관리·재료·용접·제어·디지털 기술이 요구된다.
공장을 지어놓고 전문인력이 없다면 산업단지는 결국 외형만 커질 뿐이다.
따라서 경남 SMR 전략에는 공장과 연구시설만큼이나 인재 확보 계획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역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을 연결해 SMR 전문교육과정을 만들고, 현장형 연구개발 인력을 지속적으로 배출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경남을 떠난 고숙련 인력을 다시 끌어오는 것이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대학이 배출하는 인력이 따로 움직이는 현재의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SMR 특구 경쟁에서도 ‘왜 경남인가’를 증명해야 한다
SMR 관련 특구와 지원사업을 둘러싼 지자체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경남이 특구 지정을 원한다면 단순히 “원전산업이 발달했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제조–시험–인증–연구개발–인력양성–수출을 한 지역에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특히 창원과 경남이 가진 기계·원전·조선·방산·우주항공 산업 기반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다.
이 카드를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묶는 것이 행정의 역할임을 명시하시랴.
경남 SMR 2.0의 진짜 시험대는 ‘실행 속도’다
경남 SMR 2.0은 분명 기회다. 경남은 이미 제조업 기반을 갖고 있고, 원전산업의 경험도 있다. 여기에 SMR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좋은 조건이 곧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조 6,990억 원이라는 사업 규모가 발표자료에만 남아서는 안 된다.
국비를 얼마나 확보하는지, 민간투자가 얼마나 따라오는지, 전용 제조시설이 예정대로 구축되는지, 특구를 확보하는지, 핵심 인재를 얼마나 유치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경남 기업이 글로벌 SMR 공급망에서 얼마나 높은 부가가치를 가져가는지를 매년 숫자로 공개해야 한다.
경남도 역시 ‘전략을 발표했다’는 것으로 성과를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 투자액, 고용인원, 특허, 핵심부품 국산화율, 국비 확보액, 기업 매출, 수출액, 글로벌 수주 실적 등 측정 가능한 지표로 성과를 검증해야 한다.
그래야 2035년의 ‘글로벌 제조시장 점유율 60%’라는 목표가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인 산업전략이 된다.
결국 핵심은 ‘제조 경남’에서 ‘기술 경남’으로 가는 것이다
경남 SMR 2.0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경남이 지금 도전해야 할 산업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SMR 산업의 미래를 단순히 대형 공장과 투자 규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공장을 짓는 것은 시작이고,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본게임이다.
경남이 미국 기업의 기술을 받아 제품을 만드는 제조기지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자체 기술과 핵심부품을 확보해 세계 SMR 시장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산업 거점으로 성장할 것인지는 앞으로 몇 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따라서 경남도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구호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비 확보, 원천기술, 핵심 IP, 전문인력, 시험·인증, 글로벌 수주라는 여섯 가지 병목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SMR 2.0의 성공 여부는 4조 7천억 원이라는 숫자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돈으로 경남에 얼마나 많은 기술과 기업, 일자리와 수출시장을 남기느냐로 결정된다.
경남이 정말 글로벌 SMR 허브를 꿈꾼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력과 성과에 대한 냉정한 검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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