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안전 ‘100%’의 함정…조사 끝났다고 안전이 끝난 것은 아니다
행정에는 숫자가 있다.
급경사지 몇 곳을 조사했는지, 예산을 얼마나 집행했는지, 재난보험 가입자가 몇 명인지, 사업 목표를 몇 퍼센트 달성했는지 숫자로 기록한다.
문제는 그 숫자가 때로는 ‘안전의 성적표’처럼 포장된다는 것이다.
박봉휘 경남도의원이 지난 9일 경상남도의회 건설소방위원회 도민안전본부 소관 2025회계연도 결산심사에서 지적한 ‘재난안전 100% 달성의 함정’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행정기관이 정한 성과지표를 100% 채웠다고 해서 주민의 안전까지 100%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난 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 위험은 실제로 줄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급경사지, 조사가 끝났다고 위험이 사라지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급경사지 관리다.
실태조사를 실시했다면 행정상으로는 ‘조사 완료’라는 성과를 기록할 수 있다. 예산이 전액 지원됐다면 ‘예산 집행 100%’라는 숫자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위험성이 확인된 사면이 공식적인 관리대상으로 등록되지 않거나, 정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위험한 곳을 찾아냈다면 그다음에는 누가 관리할 것인지 정하고, 얼마나 위험한지 평가하고, 언제 정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특히 집중호우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위험사면에 대한 후속조치가 늦어진다면 실태조사 100%는 사실상 종이 위의 숫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거제 수해 사례가 던지는 교훈도 여기에 있다. 재난은 보고서의 ‘조사 완료’란을 보고 발생하지 않는 게 아니라 현장의 위험이 제거됐는지를 보고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산 100% 집행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가 줄었는가’
재난안전 예산도 마찬가지다.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성과가 될 수는 없다.
그 예산으로 위험지역이 얼마나 줄었는지, 침수 피해 가능성이 얼마나 낮아졌는지, 재난 발생 이후 주민들이 얼마나 빨리 일상으로 복귀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행정의 평가 기준을 바꿔야 한다.
‘몇 곳을 조사했는가’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몇 곳의 위험을 제거했는가’를 봐야 한다.
‘예산을 얼마나 썼는가’가 아니라 ‘투입된 예산이 실제 피해 예방으로 얼마나 연결됐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재난안전 행정의 질적 전환이다.
재난보험도 가입률 숫자만 봐서는 안 된다
풍수해·지진재해보험 역시 비슷한 문제가 드러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가입률이 기대만큼 높지 않고, 지원예산이 남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보험료 지원예산 4억 원 가운데 32.4%, 약 1억2,955만 원이 집행되지 못했다.
행정 입장에서는 예산을 확보하고 사업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는다.
그러나 주민 입장에서는 질문이 달라진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나는 실제로 보상받을 수 있는가?”
1년 단위 소멸성 보험이라는 특성, 자부담 보험료 부담, 재난지원금과 보험금의 중복지원 제한 등은 가입을 망설이게 하는 현실적인 요인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가입자가 몇 명 늘었다”는 숫자만 발표해서는 부족하다.
재난이 발생한 뒤 실제로 몇 명이 보험금을 청구했고, 몇 건이 지급됐으며,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심사 중이고, 부지급 사유는 무엇인지까지 살펴야 한다.
보험 가입률이 아니라 피해 회복률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재난이 발생한 뒤 ‘지원받지 못한 사람’까지 살펴야
더 심각한 문제는 재난의 사각지대다.
주택 침수 주민, 소상공인, 농업인 등이 실제 피해를 입었지만 제도상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행정은 규정에 따라 지원했다며 업무를 끝낼 수 있지만, 피해를 입은 주민에게는 그 순간부터 생계와 생활의 문제가 시작된다.
따라서 재난안전 정책은 예방–대응–보상–회복의 전 과정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위험지역을 발견하고도 정비하지 않았다면 예방 단계에서 실패한 것이다.
보험 가입을 안내했지만 주민들이 제도를 몰랐다면 정책 전달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보험에 가입했더라도 실제 피해 이후 지급까지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면 회복 단계에서 또 다른 공백이 발생한다.
이제 ‘100% 행정’에서 ‘100% 체감안전’으로
박봉휘 도의원의 지적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행정은 숫자로 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재난은 숫자로 오지 않는다.
산사태가 발생하고, 도로가 침수되고,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상점에 물이 들어오는 순간 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사업 달성률 100%’라는 보고서가 아니다.
위험을 막아줄 시설과 신속한 복구, 그리고 실제 손실을 보전할 수 있는 제도다.
이제 경남의 재난안전 성과지표도 달라져야 한다.
첫째, 조사 완료율보다 위험 제거율을 평가해야 한다.
실태조사 결과를 관리대상 지정과 정비사업으로 얼마나 연결했는지 공개해야 한다.
둘째, 예산 집행률보다 예방 효과를 평가해야 한다.
돈을 모두 썼다는 사실보다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위험을 줄였는지가 중요하다.
셋째, 보험 가입률과 함께 실제 보험금 지급 현황을 공개해야 한다.
청구 건수, 지급 완료, 심사 중, 부지급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넷째, 재난 피해자의 회복 속도를 정책평가에 포함해야 한다.
재난 발생 후 주민과 소상공인, 농업인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를 살펴야 한다.
다섯째, 재난 사각지대를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
제도상 지원 대상에서 빠지는 피해자가 없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100% 달성’이라는 말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재난안전 행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성과지표가 정책의 목적을 대신하는 것이다.
조사해야 할 곳을 모두 조사했다면 100%다.
예산을 모두 집행했다면 100%다.
보험 가입 목표를 달성했다면 또 100%다.
그러나 주민이 위험에 노출돼 있고, 재난이 발생한 뒤 피해 회복이 늦어진다면 그 100%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난안전 분야에서 100%는 결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100%라는 숫자 뒤에 숨어 있는 1%의 위험을 찾아내는 것이 행정의 역할이다.
결국 좋은 재난안전 정책은 보고서의 숫자가 아니라 재난이 발생했을 때 주민이 얼마나 덜 다치고, 덜 잃고, 얼마나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제 경남도는 ‘사업을 완료했다’고 말하기 전에 시민에게 먼저 답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무엇이 더 안전해졌습니까?”
그 질문에 구체적인 숫자와 현장 사례로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재난안전 행정의 ‘100%’가 진짜 100%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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